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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자 로서 미국 시골 살이를 반대하는 이유
    최근 또는 현재 2022. 6. 7. 07:02

    이런데서 살고있다


    2021년 6월부터 미국 아리조나의 아주 작은 마을 중에서도 제일 끝 외곽에서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곳은 말과 소 양 등을 키우는 농가 (ranch) 가 있는 곳이며 각자의 농장이 대략 3천평 정도 되기 때문에, 이웃집들이 시야에서 안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집에만 있으면 사람 구경을 아예 못할수도 있다. 아리조나는 미국 내에서도 촌동네 취급을 받는데, 여긴 일단 대부분이 사막이라 여름에 멋모르고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생명을 잃을수 있고, 내 차는 나름 좋은 차인데도 한번 뜨거운 온도를 못이기고 망가졌다. 그렇게 덥지 않은 날이라도 아주 건조하고 흙먼지 바람이 분다. 그러다 보니 돈 있는 사람들은 기후가 더 좋은 캘리포니아 같은 곳으로 갔고, 여기는 일이나 학교 때문에 묶인 사람들, (희한하게도) 사막의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싼 생활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중부의 다른 주 들 보다는 (네브라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등) 서부 대도시에서 접근성이 좋고 대기업이나 공장들이 있어서 일자리가 많다보니 그곳들 보다는 비싼 편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진짜 생활비를 아끼고 싶으면 네브라스카나 아칸소 같은 데서 살면 되고, 꼭 아리조나에 와야 할 이유가 있어야 온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만 22세까지 살았는데, 주로 서울에서 살았고, 고등학교 3년 대전에서 살았을때를 "시골 살이" 라고 기억하고 있었을 만큼 대도시 사람이다. 대전에서도 12층 아파트 대단지 안에 살았는데 말이다. 22세에 한국을 떠나고 공부하고 취업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3대 대도시인 샌디에고, 엘에이,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총 20년을 살았다. 미국에 와서도 3층 이상 건물을 보기 힘든 오렌지카운티가 시골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미국에서 오렌지 카운티 정도면 나름 대도시임) 엘에이 다운타운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야 몇십층 이상 되는 빌딩들 사이에서 살 수 있었고, 어릴때 살던 환경과 비슷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시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마약 중독자, 구걸하는 사람들, 무례한 사람들, 소매치기, 침뱉는 사람들 등 인간 자체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어딜가나 있으나, 나는 한번도 도시에 염증을 느낀다거나 떠나서 시골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냥 인생이 그런것인 줄 알고 살았다.

    시골살이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 직장때문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서 9년째 살고 있었고, 정말 눈에 넣어도 안아플것 같은 남자친구가 청혼을 했고, 그리고 진지하게 정착을 고민하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났고, 우리는 더이상 그 비싼 샌프란시스코에서 (호구처럼) 의미없이 비싼 생활비를 내면서 살지 말고, 싼값으로 더 넓고 좋은 집을 사서 일찍 은퇴하자고 결정했다. 이제는 난 안다- 샌프란시스코의 생활비는 의미없이 비싼것이 아니라 그렇게 좋디 좋은 환경에 대한 댓가였다. 이제는 남편이 된 그 사람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백인으로 부모님이 계신 이곳 아리조나 시골 마을로 오고 싶어 했고, 나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미국 시골 살이를, 모르기때문에 무식하게 오케이를 했다. 미국 20년 살았으니 영어도 웬만큼 익숙하고, 인종차별에도 무덤덤하고, 김치 없어도 밥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약 1-2 년간 남편 부모님과 함께 살기로 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가자고 하니 별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내 인생의 3대 시련 안에드는 사건이었다.

    1. 외로움

    남편도 있고 남편의 부모님과 형제 한둘도 있는데 뭐가 외로울까? 나는 외로움이 나를 덮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도시에 있어도 코로나 때문에 2년가까이 재택근무하며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는데, 그래도 크게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 쉬는 느낌 이었다. 이민생활중 10년정도를 혼자 살았고, 혼자 여행 다니고 맛집도 혼자 다니고 바에서 혼자 술도 마신다. 나는 이곳 생활이 그것의 연장이겠다 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로 나는 사무치게 외롭고 매일 서러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우울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남편과 정말 동굴 같은데서 단둘이 살았다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데, 몇명 안되는 주변인들이 나의 문화와 배경과 음식과 언어등을 전혀 모르는데 나 혼자서 그들에게 다 맞추고 따르는 것을 몇달을 하고 나자 나는 심하게 지쳤고 공허한 마음을 어쩔 줄을 몰랐다. 누구나 자기가 겪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함부로 이야기 할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좀 알아주면 좋겠다. 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20년 이상을 산 사람은 그만큼의 깊이있는 경험과 문화로 뭉쳐진 결정체 라는 것을. 내가 20년째에도 아직도 미국에 대하여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부분이 있는것 처럼, 문화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깊이로 접근을 해야한다는 것을. 나를 보고 "아 넌 피아노 칠줄 아는구나. 내가 아는 대만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도 피아노 잘 치던데." "너네 아버지가 엄했구나. 내가 아는 그 대만 여자도 부모님이 엄하다고 하더라" 이 외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대화들이 있다. 이들 눈에는 한국이나 대만이나 비슷한가 본데, 내 입장에서는 아니다. 한국은 한국의 역사, 문화, 음식이 있고 그 깊이라는 것은 미국인이 상상하지 못할 몇천년의 세월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만도 역시 마찬가지. 이렇게 뭉뚱그려서 너네 거기서 거기 아니야? 라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무식한 짓인지 저들은 모르겠지. 미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최고인줄 알아서 다른 나라 여행은 커녕 아시아 음식도 먹기 싫어하는 이 시골에 사는 미국인들은.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경험할까? 한국사람들도 백인을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더 심할까.

    이제 내 사람이 될 것 같았던 남편 역시 그들과 어울리는게 편하고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많이 서럽고 외로웠다. 남편은 반대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시골 스러운 작은 마을에서 보냈고, 나중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대도시로 나와서 대도시에 적응한다고 마음고생한 케이스 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꿈에 그리던 시골생활을 다시 할 수 있어서 많이 행복해 했다. 남편은 나름대로 이런 저런 노력을 해 주었는데, 한국 음식도 같이 만들어서 가족들과 나누고 싶어했고 한국에 대해서 주변인들에게 소개도 좀 해주라고 했다. 몇번 그런 노력을 하고 나서 나는 알았다. 한국이 만약 미국에서 접근이 좋은 캐나다나 하와이같은 거리에만 있었어도 이들은 내 말을 들었을 것 같다. 아니, 이들이 캘리포니아나 뉴욕같은 대도시 주변 사람들이었다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이 깡촌에서 눈 닫고 귀 닫고 사는 것이 좋아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이다. 본인들의 생활 방식을 좋아하고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아무리 총기사고 난다고 해도 집에 총 열개씩 가지고 있는것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다. 한국에 겨울이 있다고, 아니 사계절이 있다고 같은 사람에게 세번을 이야기 했다. 그 사람이 만날때마다 한국에도 눈이 오냐고 세번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들은 내가 한 말에 대해 기억도 잘 못하고 관심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수천년에 결친 역사와 깊이있는 문화를 알아가는 것에 대해 귀찮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가슴을 많이 답답하게 했고 외롭게 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잘못한 게 없다. 내가 뭐라고 저들이 내 나라 내 문화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냥 혼자 외로워 하는 수 밖에 없겠다라고 포기를 하게 되었다. 나 혼자 다를때 나머지 사람들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가야 하는 것 만큼 피곤하고 외로운 것은 없는듯 하다.


    2. 무력감

    내가 사는 곳은 인프라가 거의 없다. 수도, 하수도, 집앞 도로 포장 등이 없다. 물은 물차가 배달을 해서 각각 집에 있는 물탱크에 채워 준다. 하수도도 집집마다 독립적인 시설이 땅에 묻혀있다. 도로는 그냥 흙먼지 날리는 황야의 비포장 도로라서 차는 (여유가 된다면) 4륜구동이어야만 4계절 문제없이 살 수 있다. 이러다 보니 물차에 문제가 생겨 배달이 못 오거나 하면 손수 큰 트레일러에 물탱크를 싣고 20분을 달려 물을 받아와야 한다. 하수도에 문제가 생겨도, 전기에 문제가 생겨도, 프로판 개스통이 바닥나도, 비가 와서 물이 새도 이 모든것을 다 직접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은 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다. 나에겐 너무다 당연히 비싸지 않은 비용으로 별 문제 없이 공급되었던 것들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을때, 그리고 이중에 그 어떤 것도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절망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알아도 (특히나 힘없는) 여자인 내가 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먹고 싸는 문제를 남편이나 남편의 가족들에게 항상 의지하고 부탁해야 했다. 천성이 내향인 이면서 독립적이고, 남에게 뭘 부탁하는것을 참 싫어하는 나로써는 미칠 노릇이다. 시골은 근육없는 여자에게 참으로 가혹한 것이다. 여기서 행복해지려면 자외선 신경 안쓸 수 있는 멘탈과 근육으로 무장한 몸을 가져야 한다. 외출 한번 하려고 썬크림 떡칠하는데 오분이나 쓰는 나는 아직도 멀었다.


    3. 흙먼지와의 전쟁

    건조하고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 온 주변이 비포장인 지역이다. 신발도, 옷도, 차도, 선글라스도 모자도 모두 황토색이다. 한두시간 밖에서 개똥과 죽은 나뭇가지를 치우고 코밑의 거뭇한 흙먼지 수염을 얻는다. 집은 매일 청소해도 매일 뿌연 먼지가 쌓인다. 쾌적함은 포기하는게 좋다.


    4. 예쁘고 비싼것들과의 이별

    뭘 입고 써도 황토색이 되다 보니 예쁜 신발 비싼 옷 다 의미없다. 싸고 두꺼운게 제일이다. 화장보다는 선크림 떡칠이 더 절실하다. 어차피 만날 사람도 지극히 한정적이며 그중 아무도 세련되지 않아서, 가뜩이나 다르게 생긴 나는 더 튀기 싫어서 일부러라도 꾸미지 않는다. 나는 점점 못생기고 촌스러워 진다.


    그럼 좋은건 뭘까.
    강아지가 생겼다.
    밤에 은하수를 볼 수 있다.
    백인들 사이에서 혼자 다르게 생겨서 위축되다보니 자동으로 겸손해 진다.

    말수가 줄어든다 - 나 혼자 다른 가치관으로 떠들면 (시골 사람들일지언정) 참 논리적인 백인들이 자꾸 물어보고 따진다. 피곤하다.
    한국사람 한국음식 아니 그냥 한국이 다 귀한줄 안다.

    여기서 은연중에 들은 말은 어차피 내가 원해서 내 나라 떠나 여기로 왔으니 그렇게 힘들어 할거 없다는 말이 있다. 특히나 미국에 온 이민자들한테만 참 많이 하는 말이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계 최고라는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이민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너네 나라 별볼일 없어서 떠났고 미국에서 잘 살고 싶어서 왔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렇게 세계최고의 나라에 왔기 때문에 난 투정부릴 자격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많은 이유로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하고 또 이민을 한다. 인생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꼭 경험해 보길 바란다. 당신이 필요해서 살던 곳 떠나 타지에 갔으면 힘들어 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그렇다. 아무리 죽을것처럼 외롭고 힘들어도 불평조차 못하는 것이 미국의 시골 살이이다.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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